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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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pisode 13.
      지금은 여름이고 나는 제주에 있어 성인 이후 여름의 기억은 줄곧 남쪽에 머물러 있다. 일본에서는 남쪽에 있는 섬인 큐슈에서 일 년을 보냈고 대만에도 타이난이라는 남쪽 작은 마을에 살았었다. 여름이 나를 부르는지 내가 여름을 부르는지. 여름만 되면 뜨거운 남쪽으로 떠나곤 하는 나였다. 한국에서도 여름만 되면 짧게는 한 달, 길게는 두 달 넘게 제주에서 여름을 보냈다. 여름을 좋아한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여름과 나는 늘 가까이 있었다. 처음 제주로 떠나게 된 건 도망의 목적이 컸다. 프리랜서라는 허울 좋은 말로 반 백수 생활을 이어나가는 포토그래퍼에게 ‘영감을 찾으러 제주로 떠납니다.’라는 말은 그럴듯한 포장이 됐다. ‘제주’와 ‘여름’이라는 단어가 주는 마법같은 힘이 있었다. 마법의 힘은 오래가지 않았다. 제주의 7월은 ‘장마와 태풍’의 동의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부푼 마음으로 도착한 제주공항에서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마중나온 비바람의 거친 인사를 난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나중에서야 안 사실이지만 제주의 7월은 장마로 인해 해가 뜨는 날이 좀처럼 없다고 한다. 시골 동네에서의 밤은 이상하리만치 외로워서 복작복작한 도시에서의 삶이 그립기도 했다. 밤산책을 하다보면 바다 위를 부유하는 한치잡이 배가 별처럼 반짝 반짝 빛난다. 그 아름다운 광경이 내 외로움을 가중시켜 센치 농도가 짙어지는 날이면 전화번호부에 있는 모든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곤 하는 나였다. 영감 찾아 떠난 애가 외롭다며 전화를 거는 모습에 친구들은 웃음을 터뜨렸고 난 그 웃음 덕에 외로움이 가시곤 했다. 한 달이 지나자 제주에서의 생활도 적응이 됐다. 7월이 끝나가면서 장마는 떠났고 쨍한 날들이 이어졌다. 오랜만에 보는 해가 반가워 뜨거운 뙤약볕이 따가운 줄도 모르고 신나게 산책을 했다. 오름 오르기에 취미를 붙이기도 했는데 하나 둘 오르다보니 묘한 승부욕이 생겨 점차 영역을 넓혀가며 새로운 오름에 도전했다. 에너지가 남는 날엔 집 근처 하나로마트까지 걸어가기도 했는데 40여분 정도 걸어서 도착한 마트에서 사먹는 붕어싸만코는 생각보다 더 대단한 맛이었다. 지는 놀을 바라보며 먹었던 붕어싸만코의 맛이 아직도 생생하다. 제주는 혼밥하기 애매한 식당이 많고 그마저도 일찍 문을 닫아서 자연스레 요리에 관심이 생겼다.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손질해서 먹는 과정이 즐거웠다. 무더웠던 8월 중순엔 스무디볼에 흠뻑 빠져서 매일 과일을 갈았다. 오름에 가고 스무디볼을 만들어 먹고 노을을 구경하고 저녁엔 쏟아지는 별을 보며 친구들과 통화를 했다. 제주에서 특별한 에피소드가 생기거나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대로도 괜찮다’라는 마음이었다. 어 쩌면 내가 제주에서 얻고자한 것은 영감같은 대단한 것이 아니라 편안하고 느지막한 여유였을지도 모른다. 마법은 여름이 끝나고 완전히 풀렸다. 나에겐 해야할 일이 있었고 일을 하고싶은 욕심도 있었다. 제주로 떠나기 전에는 잊고 있었던 것들이 여유를 되찾으니 다시금 하나둘 떠올랐다. 뜨거운 여름 아래에 한없이 게으르고 고독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은 나의 한 해를 움직이게 만드는 동력이기도 했다. 기어코 여름 한가운데로 다이빙했던 지난 날들이 이해가 된다. 올여름 나는 또 다시 제주로 떠난다. 나에게 여름이라는 마법을 걸며.여름마다 머물고 있는 제주 집.사촌언니가 조카들 방학을 맞이하면 육지로 떠나서빈 집을 혼자 쓰고 있다.장마가 끝나고 오랜만에 해가 떴다.신나서 괜히 발을 찍어본다.   스무 번은 넘게 올랐던 '큰노꼬메 오름'.친구가 놀러와서 기념샷을 남겨보았다. 큰 노꼬메 오름에 오르면 보이는 숲 풍경.필름카메라로 담아본 오름 정상.안개 낀 풍경이 멋져서 30분은 혼자 구경하다 왔다.  족은 노꼬메 오름에서 담아본 풍경.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어 좋아하는 사진이다. 오름의 정상엔 바람이 많이 분다. 아마 저지오름이었던가?너무 많은 오름을 올라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홈메이드 스무디 볼!바나나는 하나로마트에서 산 제주산 바나나.  친구가 놀러와서 담아준 나.제주 사는 사람같이 나와서 무척 좋아하는 사진이다.   한새미 ㅣ 프리랜서 포토그래퍼, 뮤직비디오 디렉터@saemirang 하나씩 도전하고 있습니다.자주 넘어지지만 금방 일어나는 편 입니다. 
    • episode 12.
      여름의 맛 마트에 수북이 쌓여 있는 수박들을 보면 여름이 찾아왔음을 실감한다. 수박 이외에도 복숭아, 자두, 청포도 등 알록달록한 빛깔의 과일들이 집에 쌓여 간다. 역시 여름은 과일의 계절이다. 요즘은 과일의 계절 구분이 희미해진지 오래지만, 제철의 것이 최고다. 그 중 여름 하면 떠오르는 과일을 뽑으라면 당연 복숭아라고 말한다. 그건 우리 엄마도 마찬가지. 우리 엄마는 복숭아를 먹을 수 있어서 여름이 오기 만을 기다린다고 한다. 항상 제철이 돌아올 즈음 복숭아 장수 아저씨께 서둘러 연락을 하신다. 여름을 앞장서서 맞이하는 우리 엄마. 작년에는 비가 너무 많이 와 맛이 없었다고 엄청 속상해하신 게 떠오른다.어느 날에는 가족끼리 말복이 최고다! 아니 딱복이 최고다! 하면서 이야기가 오간 적도 있다. 나는 딱복파, 엄마는 말복파. 엄마는 말랑한 복숭아를 한 입 베어 물었을 때 나오는 달콤한 과즙을 삼키는 것이 환상이라고 한다. 반면 나는 딱복의 딱딱하면서도 부드러운 식감 그리고 은은하게 풍겨오는 단맛에 빠졌다. 하지만 나는 간혹 변덕을 부리니, 내년에는 말복의 매력에 더 푹 빠져있을지도 모른다. 나만의 또 다른 여름의 맛이 있다. 바로 오미자. 무더운 여름 날 투명 유리잔에 차가운 물과 얼음 세 덩어리를 넣는다. 오미자청을 적당한 비율로 섞어 한 잔 들이켜면, '크으'하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무뎌진 여름 입맛도 살아난다. 특히 이번 오미자는 더욱 진하게 느껴진 이유가 있다. 작년 여름 끝 무렵, 외삼촌을 돕기 위해 약 3시간을 달려 강원도 산골짜기에 도착했다. 우리의 할 일은 300평이나 되는 밭의 오미자를 수확하여 청을 담그는 것. 덩굴 사이로 빼곡한 열매들을 보면 한숨이 나왔지만, 땀이 송골송골 맺히도록 일한 그 기억은 오미자를 훨씬 달게 만든다. 손에 쥔 서늘한 컵의 온도를 느끼며 가만히 앉아 시끄러운 세상 소리에 벗어난다. 나의 여름에 집중했다. 거창하지 않아도 괜찮다. 화려한 것만이 기쁨을 가져다줄 수 있는 건 아니다. 입안 가득 차오르는 복숭아와 오미자.초록색이 가볍고 부드럽게 흔들리는 곳.새로운 흙 길.마루에 가만히 앉아 맡는 풀냄새.집 앞에서 갓 따온 상추로 요리하시는 외숙모.책상 밑에서 피어오르는 모기향 냄새.평상 위에 차려진 꿀맛 같은 새참. 이 또한 진정 한 계절에 느낄 수 있는 짜릿한 여름의 맛 아닐까. 작은 순간들이 나의 여름을 누구보다도 특별하게 만들어줬다.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만의 계절의 이야기를 기억한다.나는 내가 좋아하는 초록색을, 그리고 초록색을 볼 수 있는 그 계절의 시간을 투명 유리잔에 가득히 담아 한 모금 입에 넣어 삼킨다. 여름을 담을 수 있도록. 겨울이 왔음을 온몸으로 느끼는 요즘. 나는 새로운 여름의 맛을 기다린다.   인적 드문 비탈길에서 복숭아를 판매하시는 아저씨.생각해 보면 우리 엄마는 이런 곳을 어떻게 발견한 걸까.  여름에만 볼 수 있는알록달록 여름 과일들.  기차 안에서 델리스파이스의 '고백'노래를 들으며무심결에 창밖을 봤다.  이불 빨래를 했다.내가 빨래한 걸 하늘이 알았는지얼마 지나지 않아 빗방울이 떨어졌다.  힘들어도 세상 태평하게 누워 자고 있는 강아지우리 베니만 보면 귀여워 웃음이 나온다.    노동 중에 먹는 꿀맛 같은 새참.작업을 빨리 끝내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는지서둘러 입안에 고기 한쌈을 크게 욱여 넣는다.  정다혜 ㅣ 기록가@good2nne 형태가, 내용이 어떻든저만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중 입니다.           
    • episode 11.
      새 해의 시간 난방으로 인해 후텁지근해진 방안에 찬 공기를 불어넣느라 창문을 열고 기대어 잠깐 서있는 중에도 발끝이 얼어붙을 것만 같다. 겨우내, 따뜻한 사람들을 나의 집에 초대해 서로의 온기로 한기를 거두어내는 것을 즐긴다. 바깥은 차갑기에 안쪽으로 더 가까이 느낄 수 있는 온기를 사랑한다. 없는 곳에서 있게끔 하는 것. 그것은 내 삶의 특기이며 탄성이기도 한데, 겨울밤을 함께한 이들을 각자의 곳으로 돌려보내고서 내 곳에 홀로 남아 아침해를 쬐고 있자니 이 감각은 문득 지난여름을 떠오르게 한다. 연도별로 차근차근 같은 계절을 넘겨보다 보면, 내가 느낀 것은 아주 해묵은 기억들보다도 예년의 여름과는 조금 달랐던 올여름의 감각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생동하는 에너지 덕에 여름이 돌아오면 비행기를 타고 곳곳을 떠다녔던 나에게도 모종의 이유로 집에 박혀, 시간을 이겨내야만 하던 때가 있었다. 집에서의 시간이 길어지며 서향집의 여름엔 낮고 길게 파고드는 겨울 볕처럼 해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시간이 있음을 알아챘다. 그것이 내게 주는 에너지는 대단했다. 복잡한 마음이, 꿈꾸는 시간까지 이어져 나를 괴롭히던 밤을 지난다. 밤새 맞은 선풍기 바람에 서늘해진 몸을 일으켜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오면 여름 정오 무렵의 열기가 살갗에 스민다. 어제 열어둔 베란다 문 틈새로 들어온 볕이 눈을 부신다. 더운 초여름 공기가 집 안을 덥혀 마른 빨래의 바삭하고 푹신한 냄새가 코 안을 훅 스친다. 나는 그렇게 매일 새 해를 맞이하여 지난 새벽의 허물을 벗어 내고 마음을 일깨워 언제 그랬냐는 듯 새 하루를 살아내곤 했다. 여름이 지나간 자리에서 다시 그 여름을 떠올린다. 집을 비워두는 시간이 더 길어진 지금, 쉬는 날 집에 가만히 고여있을 때면 그때 보았던 빛 그림자의 모양새를 조금 더 이른 시간에 만날 수 있다. 해의 힘을 믿는다. 해가 유독 길게 유동하는 여름에 시간을 버텨내야 하는 운명이었던 것은 일종의 선물이었을 수도 있겠다. 신은 딱 감당할 만큼만의 고통을 주니까. 나의 의지로 나아질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나 무기력 같은 것들은 해가 그린 형상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순간 깨끗이 사라진다. 감정은 사라지고 눈앞의 일렁이는 빛 그림자와 함께, 일렁이는 심장의 두근거림만 남는다. 새 해의 시간을 채운다.  해가 남긴 그래픽 1    해가 남긴 그래픽 2 해가 남긴 그래픽 3 새 해를 맞으며 마주하던 여름 정오의 공기   해가 남긴 그래픽 4  이주현 ㅣ 브랜드 디자이너@eejuhyn 그림의 한 가운데가 아닌 캔버스의 옆면을 보는버릇이 있습니다.공감각적 디자인을 합니다.
    • episode 10.
      엄마의 여름 엄마의 얼굴이 보기 싫어 자꾸만 고개를 돌렸다. 여름의 열기와 자외선에 얼굴이 많이 상해 부쩍 늙어 보였기 때문이다. 엄마는 여름 내내 커다란 온실에서 파프리카와 방울 토마토를 따는 일을 했다. 그런 엄마가 나를 만나려고 잠시 짬을 내어 제주에서 올라온 것이었다. 자그마한 캐리어를 끌고 오피스텔 밑에 도착한 엄마의 얼굴을 본 순간 흠칫 놀랐다. 두달 전 제주에 내려갔을 때 본 엄마의 얼굴이 아니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은 윤없이 퀭하고 주름이 부쩍 깊어진 데다 머리카락은 염색을 안 해 희끗희끗했다. 한여름을 지나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엄마가 내 집에 머무른 주말 동안 나는 내내 퉁명스러웠다. 묻고 싶은게 많았지만 나는 왜 이렇게 얼굴이 상했냐는 걱정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 그 말을 꺼내는 순간 울어버릴 것만 같아서. 상한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보고 눈물을 쏟아내는 대신 못된 딸이 되기로 한 것이다. 진짜 마음을 숨기기 위한 얕은 수 였다. 엄마는 그런 내게 복숭아를 한 봉지 사주며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저녁 바람이 선선해지는 늦여름이었다. "너는 고등학생 때랑 달라진 게 없네." 함께 저녁 산책을 나가려는데 엄마가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엄마가 한 말은 그것뿐이지만 그 뒤에는 '나는 이렇게 늙었는데...'라는 말이 숨어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종종 내가 모르는 엄마의 여름이 어땠을지 상상하곤 한다. 까무잡잡하고 생기 넘치고 젊은 엄마의 얼굴을. 그녀는 그런 얼굴을 하고서 어린 나를 토닥이며 밤 늦게까지 귀가하지 않는 남편을 기다렸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엄마의 여름이 내 여름만큼 제멋대로고 철없고 방탕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마음 한 구석이 저릿해진다. 엄마는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이 들이켜는 파도를 보고 있으면 속이 시원해 진다고 했다.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되고, 며느리가 되느라 애써 자기 자신을 누르며 젊은 날을 보낸 사람의 감상이었다. 그녀는 죽기 전에 꼭 세계 3대 폭포를 보러 떠나고 싶다고도 했다. 그 사람의 꿈. 나는 엄마를 빅토리아 폭포로, 이과수 폭포로, 나이아가라 폭포로 데려가는 꿈을 꾸며 산다.  고왔을 엄마의 손은 이제 거칠고 주름이 많고 뼈마디가 뭉퉁하다.엄마의 여름은 끝이 난 걸까?  내내 뾰족했던 내게 엄마는 선선한 웃음을 지으며복숭아를 건넸다. 나와 동생이 잠든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며아빠를 기다렸을 엄마. 내가 좋아하는 엄마의 연애 시절 사진.입꼬리의 점이 예쁘다.  엄마는 가끔 혼자 파도를 보러 바다에 간다.어떤 여름에 꼭 엄마와 함께 이과수 폭포 앞에 설 것이다. 고건녕 ㅣ 번역하고 쓰는 사람@dexy.koh 3년간 공무원으로 일하다평생 직장인으로 살 용기가 없어 그만두었다.'아무것도 아닌 나'를 사랑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동시에 남편과 내 개를 위해 '누군가'가 되는 꿈을 꾼다.
    • episode 09.
      우거진 여름의 적막 마치 가을에 수확한 작물을 말려 겨우내 두고 먹으며 계절을 견뎌내는 것처럼 나는 여름의 기억을 쌓아 놓고 메마른 겨울을 지낸다. 여름이 시작되면 먼저 캐리어 안에 알록달록한 옷더미들을 퀴퀴한 초봄의 옷과 바꾼다. 잠옷의 면적이 작아진 만큼 시원하고 부드러운 소재의 이불을  꺼내오고, 긴 계절 내 쌓여있던 에어컨의 먼지를 구석구석 닦아낸다. 빨래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가볍게 삶아낸 메밀국수를 먹고, 가벼운 물 샤워 후에 바삭거리는 새 이불 위로 드러눕는다. 여름의 시작을 기념하는 나의 작은 관례. 여름 낮 산책은 더위를 피하고자 말수가 적어지고, 걸음은 더욱 신중해진다. 작은 부채질로 느리게 내디디며 모두 에어컨 바람 아래로 숨어버린 길을 홀로 활보한다. 맘에 드는 그늘아래 자리를 잡고 어깨에 메어둔 텀블러를 꺼내 시원해진 커피를 졸졸 따라 마시고는 쉼 없이 울리는 매미 소리를 듣는다. 여름은 소리로 가득 차 있다. 끊임없이 진동하는 선풍기 소리, 에어컨 소리, 매미 소리. 이미 공간을 가득 채운 소리에 더는 힘겹게 떠들 필요가 없어진다. 가만히 누워 감상하던 바다의 기억도 떠오른다. 쉼 없이 들려오는 파도 소리에 음악은 오히려 소음이 되고, 들떠있는 휴양지의 소음은 바다가 안고 올라왔다, 내려갔다. 더위에 노곤해진 몸을 쉽게 침대에 내던진다. 잠에 들기엔 이른 시간이지만, 깨어도 빛은 잠들기 전과 다를 바가 없기에. 아직도 대낮인가 하는 착각을 한 채 지끈한 머리를 들고, 낮보다 붐비는 저녁의 거리를 나선다. 마치 반대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인 것 마냥 활기차게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이 새삼 신기하다. 끝을 모르는 아쉬운 밤을 노란 스탠드 불빛 아래 맥주로 애써 마무리하며 또 잠에 든다. 여름에 대한 감상을 정리하며 왜 그렇게 외로움 없이 조용한 기억들뿐일까 고민해 본다. 피할 수 없는 더위가, 내딛는 발마다 부딪히는  들꽃들, 어딜 둘러봐도 빈틈없이 들어찬 녹음이 혼자였던 시간을 구석구석 채워줬기에, 그것들이 나에게 쉬이 쓸쓸할 틈을 주지 않았기에 그렇게 기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여름에게 고마움을 느끼며.기억나지 않는 이름의 섬, 여유롭게 누워있고 싶었다만,단체 투어 중이라 힐긋 구경하고 얼른 배에 올랐다.햇빛에 강한 피부라며 선크림도 바르지 않고내내 태국을 배회하다 결국 이런 사달이 나고 말았다.  땀에 들러붙은 모래.야자수.태국이었던 것 같다.사그레스의 바다.물이 계곡물처럼 차, 겨우 다리만 담그고 뛰쳐나왔다.서울로 돌아가는 날 아침,극적으로 비가 그쳐 부지런히 바다 구경을 나갔었다.함께하는 여행 내내 친구가 입에 달고 살던 복숭아.어깨에 김밥을 이고 바다로 향하는 중.이렇게 보니 많이 그을렸었구나 싶다.김재윤 ㅣ 프리랜서 포토그래퍼@basilqim  부유중 입니다.
    • episode 08.
      여름 방학 어렸을 적 여름방학이 오면 시골에 내려가 할머니 할아버지 곁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곤 했다. 뜨거웠지만 부드러운 미풍을 여유롭게 느낄 수 있었고, 내리쬐는 햇볕으로 농익어 가는 농작물을 보며 할아버지를 따라 일을 도와드렸다. 한여름에 탈이 많이 나는데 할머니가 해주는 제철 음식들은 건강하게 곧, 잘 먹었다. 금방 무기력해질 수 있는 무더위 속에 부지런히 논에 가서 일하시는 할아버지를 보며 시골에서의 이 계절은 참 빠르게 지나간다는 걸 느꼈다. 부지런히 움직이는 만큼 얻게 되고 무성히 자라는 짙은 자연, 풍성한 꽃들과 푸른 하늘을 보며 어렸을 적 나의 여름은 선명한 색으로 자리 잡은 듯하다. 성인이 되고 처음으로 가진 올해 여름방학. 도시에서의 뜨거운 소음보단 녹음들로 가득 찬 조용한 시골의 곁에서 에너지를 충전하고 싶었다. 예전과 달라진 건 내가 아기 때부터 좋아했던 느티나무가 수명을 다했고, 어르신들이 머무는 마루에 누워 햇살을 받으며 낮잠을 자던 공간도 공사로 인해 없어졌다. 과거 여름날의 장소들은 흩어져 사라졌지만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할머니의 따뜻한 사랑, 여전히 부지런히 생활하시는 할아버지. 그들의 곁에서 길고 느릿하게 호흡하며 내 감정을 고요하게 달래기 충분했다. 아무런 계획도 설계도 없었고, 몸은 누구보다 부지런했던 시골에서의 여름은 온전히 나를 위한 건강한 시간이었다. 겨울이 오면 은은하게 빛났던 나의 여름방학을 다시 떠올리며 따뜻하게 마음과 몸을 잘 녹여봐야겠다.누워서 바라본 나뭇잎 사이로 비추는 여름 햇살논에 가시는 할아버지의 뒷모습내가 좋아하는 시골 산책길여름 김장하시는 할머니의 뒷모습내가 좋아하는 시골 산책길인다솜 ㅣ 모델@indasom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으며,처음 가진 꿈과 함께 나만의 속도로걸어가고 있는 중입니다.있는 그대로의 소박한 삶과담백하게 표현하는 걸 좋아합니다.
    • episode 07.
      여름의 끝자락 일년 전, 빨간 벽돌의 오래된 빌라로 이사오는 날, 전에 살던 사람들의 짐이 다 빠진 텅 빈 집을 보고 불안해졌다. 짐이 빠지니 보이는 벽 위의 세월의 흔적들, 생각보다 어두운 구조, 나의 첫 자취, 나 잘한 걸까? 텅텅 빈 방에 퉁퉁 울리는 발걸음으로 집안을 서성거렸다. 침실이 될 방에 들어가 둘러보는데 창문 유리는 답답하게 시트로 막혀져 있어 빛도 들지 않았다. 허탈한 마음으로 밖도 안 보이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내 눈 앞에 펼쳐진 상황에 마치 아무도 모르는 보물을 찾아낸 사람처럼 와! 하고 탄성을 질렀다. 높이 위로 솟는 나무가 창문 바로 앞에서 푸릇푸릇한 여름 잎을 흔들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고, 매미소리가 왕-왕-하며 순식간에 집안을 가득 채웠다. 창문을 열어보니 이 집은 여름 그 자체였다. 이걸 모르고 이 집에서 살다니, 바보들! 이 창문을 이런 시트로 덮고 책장으로 가리다니! 그걸 모르고 이 집을 계약한 나는 엄청난 행운아였다. 이제보니 창문도 일반 창문이 아니라 곡선형태로 꺽인 파노라마 모양이었다. 신나는 마음으로 집을 꾸밀 생각을 하며, 내 리스트 가장 위에 '창문 유리 투명으로 교체'라고 적어두었다. 일년전에 발견한 이 비밀의 창문 덕에 여름 내내 아침마다 숲 속에서 깨는 듯한 상쾌함을 즐겼다. 열어둔 창문으로 무겁지만 향기로운 여름 바람이 이마로 내려온 머리카락을 솔솔 불고, 일년 사이에 함께 하게 된 귀여운 강아지 룸메이트 수리가 탁탁탁탁 소리를 내며 깨우러 오면 함께 아침부터 해가 쨍쨍한 골목 골목을 돌아다니곤 했다. 추위에서 벗어나 마음 편히 산책을 하나 싶었는데, 이제 1살이 된 수리의 첫 여름은 조금 힘들었는지, 하루가 길어질수록 몇 보 걷고 털썩 길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럴만도 하지, 밍크 코트를 두르고 한 여름을 걷는다고 생각해봐."라고 엄마가 웃으며 말하곤 했다. 우리는 여름 동안 그늘을 찾아다니며 쏘다녔고, 여름이 하루이틀 만에 끝나지 않는 다는 것을 받아들인 수리는 최후의 수단으로 "입수"를 하기 시작했다. 길을 나서면 정신없이 나를 끌고 가 어디가 되었든 물이 고인 곳을 찾아 (주로 아파트 단지 내 분수, 큰 공원의 호수, 여행간 곳의 계곡 등) 털썩하고 물 속에 앉아버렸다. 시간이 지나 며칠 전부터는 에어컨을 켜지 않아도 시원하게 잘 수 있게 되었다. 파노라마 창문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쌀쌀해 잠결에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올렸다. 시원해지니 얼른 밖으로 나갈 용기가 생겼는지 수리가 나를 찾아오는 시간도 조금씩 빨라지고 있다. 우리는 이제 조금은 푸르스름한 길거리를 나서 해가 뜨기 시작할 때 쯤 집에 들어온다. 여름이 지나는게 아쉬운지 뒤늦게 찾아온 장마도 이제는 제법 차가운 비로 우리를 서늘하게 한다. 쨍한 날은 가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혼자였다면 여름이 끝나고 추운 겨울을 향해 매일을 스쳐보내는 것이 벌써부터 마음이 아릴텐데, 날이 풀려 더 오래 더 멀리 함께 걸을 수 있는 여름의 동반자와 함께 하니 오히려 시원한 여름의 끝자락이 반가웠다. 그렇게 나는 여름의 떠나가는 뒷모습마저도 사랑하게 되었다!파노라마 창틀에서 아침 햇살을 맞는 수리.너무 더워서 누워서 물을 마시는 수리. 더워서 걷지 못하는 수리-여름에 약한 강아지,여름을 사랑하는 언니가 함께 하는 법.강아지는 더우면 혀를 내밀어 온도를 낮춘다.최대한 혀를 내민 수리.잠시 수리를 집에 두고한여름날의 재즈 공연을 보러왔다.임수민 ㅣ 스트리트 포토그래퍼@sooeatsyourstreetforbreakfast 길거리에서 잊혀져가는 순간과 사람들을담다가 어느날 불현듯 태평양 항해를 하러 떠났다.현재는 글로벌 브랜딩 일을 하며반려견 수리와 함께 일상 속의 모험을 하는 중이다.
    • episode 06.
      모든 것을 내려놓으면 어렵지 않은 일. 모두가 잔뜩 설레는 마음으로 준비하는 한 해의 마지막 달. 겨울에 태어난 나는 그 포근함이 좋아 겨울을 사랑하던 아이였는데 언젠가부터 나는 여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득 현재의 무료함을 느낄 때 즐거운 상상을 하며 그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상쾌해지는 나의 기억 속 장면들. 오늘도 어김없이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을 때 그 상상 속에 들어가 버리곤 한다. 혼자서는 처음 해본 등산을 한 후였다. 땀범벅에 흙냄새 머금은 몸을 하고서는 젖은 머리 모자를 푹 눌러쓰고 동네 구석구석을 목적지 없이 계속 걸었고 지금이 몇 시인지는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기분이 이끄는 대로 뜨거운 태양빛 아래 땀 흘리며 그냥 계속 걷는 것이다. 한참을 거닐다가 목이 말라 근처 카페에 들어갔다. 실내에 들어가니 온몸에 전율이 흐르듯 시원한 에어컨 바람. 아메리카노 한 모금을 넘기니 언제 그랬냐는 듯 끈적했던 몸이 마르고 몸도 마음도 한결 가벼워진 나를 느낄 수가 있다. 자리에 앉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실내에 있던 나는 이왕 땀으로 젖은 몸 남방 하나와 모자로 가리고 햇살을 더 즐기고 싶어 실외 테라스 자리로 옮겼다. 무더운 날씨에 앉아 있는 동안에도 점점 몸이 끈적거리기는 걸 느끼긴 했지만 잘 보일 사람도, 이런 나를 불쾌해할 사람도 없는데 신경쓰일 거 뭐 있나. 그렇게 한참을 책을 읽으며 밖에서 쉼을 청했다. 다른 사람들도 하나 둘 테라스 자리가 궁금해 밖을 나왔다. 하지만 뜨겁게 내리쬐는 햇살에 머지않아 바로 실내로 들어가 버리는 사람들. 그 사이에서 모든 것에 개의치 않은 자유로운 상태의 홀로 밖에 남아있던 그 순간의 내가 나는 너무 좋았다. 남들보다 더 자유로운 이방인이 된 듯한 그 기분. 그날의 쾌락은 몇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잊지 못할 나의 여름 중 어느 한순간이다. 그때부터 알았던 것 같다. 땀은 흘리면 닦으면 되는 거고 흠뻑 젖은 몸도 햇빛에 찡그려진 얼굴도 가만히 그대로 둔 채 앉아 있으면 그 무덥던 여름도 언젠가는 식는다는 것을 말이다. 옷 자국 그대로 그을려진 피부와 눈가에 자리 잡은 기미와 주근깨들, 타인에게 발그레진 볼과 땀으로 젖은 얼굴을 드러내는 게 꽤나 부끄럽지 않을 수 없지만 내가 그 모습 자체를 연연해하지 않고 사랑할 수만 있다면 언젠가 자연스럽게 익숙해지다 보면 고통스럽게만 생각하던 무더위의 그 한 달 남짓한 여름도 꽤나 금방 지나간다는 것을 말이다. 그 모든 시간과 순간들은 다 잠시일 뿐이다. 피할 수 없는 자연의 흐름은 내가 바꿀 수 있는게 아니니 그럼 내가 그에게 맞추면 그만이다.여름에 장시간을 걷기 위해 꼭 필요한 준비물.몇보를 걸었는지는 모르겠다. 체감온도 40도가 넘던 날.흰옷이 다 젖어 비칠정도로 정말 많이 걸었다.그 날의 기록.걷다가 발견한 고양이집.이 아이들을 케어해주시는 분이 집도 만들고 그늘도 만들어주신 듯 하다.너희는 좋겠다. 몇시부터 몇시까지 였을까,해가 지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물에서 나올 생각이 없었던어느 여름날.박온도 ㅣ 기록가@parkondo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 것일까끊임없이 마주한 나를 향한 질문에결국 프리랜서가 되었다.특정되지 않은 스스로에게 집중하며삶을 기록하는 기록가이다.
    • episode 05.
      대낮의 따사로운 공기. 감사를 느끼게 되는 한낮의 여름에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들이 있다.순간의 기록이 반짝이는 조각이 되는 여름의 빛. 여름이 시작됨을 알리는 여름의 필수 배경음악인 없으면 서운한 매미들. 뼛속까지 시원하게 해주는 달달하고 시원한 여름 과일. 빛나는 바다와 하늘에 떠있는 새하얀 구름. 살랑이는 작은 바람결도 평소엔 아무 생각 없이 마시던 물 한 잔까지도 너무나 소중한 한 뼘짜리 여름의 조각들. 늦여름 밤의 미지근한 공기. 석양과 함께 지는 뜨거운 대지. 열기의 잔향이 떠나고서 찾아온 긴 밤을 더욱더 운치 있게 해주는 귀뚜라미의 귀뚤귀뚤 울음소리.숨 막힐 듯 가라앉았던 대기는 아직 몸을 덥혀주지만 어느덧 얼굴에서는 상쾌한 바람이 가슴을 가득 채워 준다. 이제 조금씩 가을의 냄새가 난다.햇님 냄새습기 가득한 여름의 방에 무심히 들어오는 선풍기의 바람. 사각모양으로 수놓은 수박 한입으로 올해 여름의 시작을 알린다. 여름엔 햇볕에 휘날리며 춤추는 빨래들이 유독 생각이 나곤 한다. 어린 시절 나의 엄마는 햇볕에 바싹 마른 이불과 수건에서는 햇님 냄새가 난다며 한 번씩은 꼭 냄새를 맡아 보라고 하셨는데 보송보송 잘 마른 빨래에서는 편안하고 따뜻한 냄새가 났고 난 이 냄새를 매우 좋아해 자주 맡아보곤 했었다.  오빠와 나는 꽤 오랜 시간 동안 빨래 냄새를 햇님 냄새라고 믿고 불렀는데 햇님 냄새가 섬유 유연제의 냄새란 걸 안 뒤로 햇님 냄새란 단어는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져 버렸고 빨래더미의 냄새도 더 이상 맡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오늘은 유독 그 소소한 시간들이 그리워져 괜스레 빨래더미에 얼굴을 파묻어 숨을 크게 들이 마셔 본다. 여전히 좋은 햇님 냄새가 난다.도시를 가로질러 공항으로 간다.스르르 잠이 들었다. 스며들기 좋은 오늘 어떤 날도, 어떤 말도. 간격이 허물어졌다. 공간을 채워주는 여름의 빛.여름 한 모금을 머금어 본다. 작은 파도를 따라가던 돌고래. 창 너머의 여름. 태안 사구에서의 여름 조각.김반지 ㅣ 프리랜서 포토그래퍼@ring.kim  계원예대 비주얼아이덴티티를 전공하였으며현재 디자인, 포토그래피 등 다양한 비주얼 아트 작업을진행하고 있습니다.
    • episode 04.
      뜨겁게 아팠던 그 여름 지금은 남편이 된 사람과 위태로운 관계를 이어갔던 어느 여름이었다. 그는 끝내 이별을 통보하고서 삿포로로 가족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며칠 뒤, 나는 겁이 나기 시작했다. 집에 진작에 돌아왔을 텐데 그와 통 연락이 되지 않아서였다. 그는 우리가 이별한 거로 생각했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 급기야 그가 사는 동네로 가 수상한 사람처럼 그의 집 앞을 서성이기에 이르렀다. 도무지 문을 두드릴, 아니 이별을 직면할 용기가 나지 않아 한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배는 수화기 너머에서 울먹이는 나를 집으로 돌아가라며 다독였다. 자신이 아는 그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거라면서 말이다. 나는 힘껏 이별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의 집 앞 도서관 테라스에 앉아 심보선의 시집 <오늘은 잘 모르겠어>을 펼쳤다. 이거만 읽고 돌아가는 거야. 평소와 다르게 시어 하나하나를 곱씹어 읽어 내렸지만, 왼손은 금세 무거워졌다. 시집은 왜 이렇게 얇은 걸까? 외우기라도 할 태세로 시집 마지막 장을 몇 번째 읽고 있는데, 어깨 위로 뜨거운 손이 툭 하고 떨어졌다. 고개를 돌리니 검고 진득하게 그을린 그가 있는 것이다. 흙탕물에서 첨벙거리다 온 소년처럼 검붉게 달아오른 얼굴은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즙을 온통 짜내고 있었다. 우리는 아무 말없이 손잡고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한참을 부둥켜안고 울다, 바닥에 마주앉아 냉침한 홍차를 마셨다. 그는 트렁크에서 작은 선물 상자 몇 개를 꺼내주었다. 그가 사랑하는 일본 브랜드 KAPITAL의 스마일 머리끈, 강아지 모양을 한 황동 열쇠고리, 악기를 연주하는 고양이 주석 보석함이었다. 괜히 보석함 안에 왜 아무것도 없냐고 핀잔을 주니, 그는 그런 건 예상도 못한 듯 미안하다며 웃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그는 여행하는 동안 주인에게 도착하지 못할 지도 모르는 선물을 수집했던 거다. 그렇게 매정하게 이별을 선고하고서. 작은 창 너머 수양버들이 잎을 찰랑이며 시원한 바람을 일으켰고, 홍차 맛은 달았다. 지난해 가을, 남편은 당시 내가 그를 기다린 자리에서 프로포즈했다. 서로의 짧은 부재로 간신히 얻은 다행.  그 해 여름이 우리에게 남긴 것이다.비오는 날의 산책 코스어느 여름 농원에서 본 사과나무창 너머 도서관이 보였던 광장동 집장맛비로 축축해진 길 위의 능소화우리를 자주 내려다본 고양이지금은 혼자 먼 여행을 떠난 봄이와 남편성보람 ㅣ 포에지 대표@milkywaybook  포에지(@page.poesie)라는 이름의 선물 가게를 운영하면서프리랜스 라이프스타일 · 뷰티 에디터로 일한다.시어 하나하나 공들여 고르듯 선물을 고르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 episode 03.
      여름 옴니버스 콧등 위의 땀, 시원한 맥주 한 모금, 규칙적으로 부서지는 파도 소리와 피서지의 소란함. 여름 특유의 공기가 보통 순간에 낭만을 뿌려 대는지 가만히 있어도 그럴싸한 장면과 사연을 만들어낸다. 여름 에피소드를 물어오는 친구들의 귀를 늘 쫑긋 세우는 사연은 단연 내가 한눈에 반한 '그 아이' 이야기이다. 따뜻한 섬에서 만난 그 아이는 바다처럼 푸른 눈에 그을린 피부 톤, 아주 짧은 머리 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서핑 수트를 허리춤까지 말아 내린 그는 모래사장 위에 앉아 먼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두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휘둥그레졌다. 무심한 척 그를 곁눈질하고 있을 때 그가 내게 말을 건네 왔다. "넌 어디서 왔어" 몇 마디 안되는 대화가 오고 갔지만, 그 내용을 기억할 리 없다. 다만 그가 저녁에 있을 홈 파티에 초대했을 때, 다섯 시간의 서핑으로 퍼렇게 바랜 입술을 하고 넋을 놓았을 나의 멍청한 모습만은 확실하다. 검게 번진 아이라이너와 입술로 집에 도착했을 때 나는 이 모습을 만회하려고 어느 때보다 공들인 화장을 한 후 그의 집으로 향했다. "안녕" 그는 문을 열어주며 다른 사람이 되어 온 나를 보고 조금은 놀란 눈치였다. 옥상에 나와 나란히 걸터앉은 '그 아이'는 파도 때를 기다리는듯 쏟아지는 별들을 숙연하게 응시했다. 섬은 밤이 되면 셀 수 없이 많은 별이 하늘을 수놓아 어둠을 잊을 지경이었다. 맥주를 홀짝이며 가볍지만 깊이 있는 대화를 주고받았다. 이번엔 낮이 걷히고 검푸른 밤이 내려앉은 그의 눈동자가 궁금했다. 조심스레 고개를 돌려 그의 눈동자 색을 살피려 했지만 그는 기회를 내어주지 않았다. 되려 감은 눈으로 잊은 줄 알았던 어둠 속을 허둥댔다. 맥주를 쥐고 있던 손이 갈 곳을 잃었을 때 그는 능숙하게 맥주를 한 켠으로 밀어냈다. 나는 속으로 오간 데 없이 사라진 맥주가 놀랍다고 생각했다. 마구잡이로 엉켜있는 머릿속과는 반대로 선선한 밤공기에 간헐적으로 실려 오는 바다 냄새와 파도 소리만이 우리를 담담하게 훑었다. 여름은 계절이라기보다 옴니버스 구성의 책 한 권에 가깝다. 개연성 없는 사연들이 여름이라는 주제로 한데 엮인다. 그러니 내게 여름이 왜 좋으냐는 물음은 줄거리를 물어오는 것과 같아 서두를 다듬다 결국 말끝을 흐리게 한다. 나를 하염없이 늘어지게 했다 또 들끓게 하기를 반복하며 매년 변덕스레 찾아오는 여름은 아무래도 목차를 끝낼 생각이 없는 듯 하다. 아 ㅡ 하지만 얼마나 기특한 일인가? 책 한 권에 먼지가 쌓일 때쯤 다시 펼쳐 볼 생각에 매년 나를 설레게 하는 여름이라는 녀석은. 나는 아직도 여름을 쓰는 중이다.  좋아하는 여름의 요소들이 한데 녹아있는 사진.해질녘 노을, 밤공기, 바다 그리고 사랑.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은 모두 이 친구로부터 나왔다.가장 편안한 장소에서 가장 편안한 웃음으로제일 사랑하는 남자와 떠난 필리핀에서.그 남자는 바로 우리 아빠.서퍼들의 성지인 발리의 짱구.이른 아침 서핑 후 늘어지게 놀다가 지는 노을 앞에서.보기만 해도 느껴지는 발리의 뙤얕볕과 습도.더우니까 여름이다. 나는 여름 사냥꾼.예쁜 표정으로 코코넛 음료는 마실 때마다맛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이혜리 ㅣ 롤링온더그라스 디렉터@hari_day  감상하고 창작하기를 좋아합니다.글쓰기에 큰 재주는 없습니다만 솔직 담백한 이야기를가끔 꺼내 씁니다.
    • episode 02.
      주근깨가 짙어진다 어릴 적부터 얼굴에 주근깨가 있었다. 친구들과 비교하면 내 피부는 이방인의 피부 같았다. 그게 늘 싫고 부끄러웠다.  아빠도 엄마도 심지어 동생에게도 주근깨는 없었으니까 엄마가 늘 농담처럼 말하던  ‘주희 너는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애야’를 철썩 같이 믿었다. 그런 말을 웃으면서 하는 엄마가 한때는 야속하기도 했다. 나는 학창시절 내내 그것을 더 많이 만들지 않으려고 늘 볕이 없는 그늘로 얼굴을 감췄다. 사람들이 없는 길을 걸을 때면 몸은 볕에 내놔도 얼굴만은 감추려고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고 걸었다. 때문에 사방이 뜨겁고 볕이 드는 여름은 자세가 비틀어지고 그늘 밑으로 숨는 계절이었다. 친구들이 좋아하는 계절을 물으면 (여름이 싫어서) 겨울을 좋아한다고 했다. 겨울은 상대적으로 볕이 덜 드는 계절이니까.  늘 피하고 싶던 계절을 좋아하게 된 건 이 피부를 달리보는 사람들을 만나고서부터다. 혼자서는 좋아하려야 좋아할 수 없는 주근깨를 만나는 사람들은 좋아했다. 심지어 그것을 가지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 마저 만나게 되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티 없이 깨끗한 피부가 훨씬 예쁘니까 나는 그것을 가지고 싶어 그리 숨어다녔는데 말이다. 내가 가진 것을 누군가 가지고 싶어하고, 나는 누군가를 보며 내게 없는 것을 가지고 싶어하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서로가 가질 수 없는 것을 탐하는 핑퐁의 시간이 켜켜이 쌓이면서 나는 되려 내게 주어진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서서히 그늘 아래로 숨는 일을 줄여나갔다. 여름이 오면 주근깨가 짙어진다. 짙어진 주근깨는 자세를 비틀지도 그늘에 숨지도 않고 곳곳하게 지낸 나의 여름 날을 방증한다.  무더운 이번 여름도 역시나.햇볕에 그을린 망고주근깨 짙은 나리꽃얼음물 한 잔과 편지한 낮의 여름 볕 1한 낮의 여름 볕 2한 낮의 여름 볕 3문주희 ㅣ 글월 디렉터@munjuhee 인터뷰를 하려다가 편지 가게 주인이 되었다.이번 생에 주어진 운명이라 받아들이며 가게를 이끌고 있으며,편지와 관련된 제품과 서비스를 기획하고 실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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