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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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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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겁게 아팠던 그 여름 



지금은 남편이 된 사람과 위태로운 관계를 이어갔던 어느 여름이었다. 그는 끝내 이별을 통보하고서 삿포로로 가족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며칠 뒤, 나는 겁이 나기 시작했다. 집에 진작에 돌아왔을 텐데 그와 통 연락이 되지 않아서였다. 그는 우리가 이별한 거로 생각했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 급기야 그가 사는 동네로 가 수상한 사람처럼 그의 집 앞을 서성이기에 이르렀다. 도무지 문을 두드릴, 아니 이별을 직면할 용기가 나지 않아 한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배는 수화기 너머에서 울먹이는 나를 집으로 돌아가라며 다독였다. 자신이 아는 그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거라면서 말이다. 나는 힘껏 이별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의 집 앞 도서관 테라스에 앉아 심보선의 시집 <오늘은 잘 모르겠어>을 펼쳤다. 이거만 읽고 돌아가는 거야. 평소와 다르게 시어 하나하나를 곱씹어 읽어 내렸지만, 왼손은 금세 무거워졌다. 시집은 왜 이렇게 얇은 걸까? 외우기라도 할 태세로 시집 마지막 장을 몇 번째 읽고 있는데, 어깨 위로 뜨거운 손이 툭 하고 떨어졌다. 고개를 돌리니 검고 진득하게 그을린 그가 있는 것이다. 흙탕물에서 첨벙거리다 온 소년처럼 검붉게 달아오른 얼굴은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즙을 온통 짜내고 있었다.

 

우리는 아무 말없이 손잡고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한참을 부둥켜안고 울다, 바닥에 마주앉아 냉침한 홍차를 마셨다. 그는 트렁크에서 작은 선물 상자 몇 개를 꺼내주었다.

 

그가 사랑하는 일본 브랜드 KAPITAL의 스마일 머리끈, 강아지 모양을 한 황동 열쇠고리, 악기를 연주하는 고양이 주석 보석함이었다. 괜히 보석함 안에 왜 아무것도 없냐고 핀잔을 주니, 그는 그런 건 예상도 못한 듯 미안하다며 웃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그는 여행하는 동안 주인에게 도착하지 못할 지도 모르는 선물을 수집했던 거다. 그렇게 매정하게 이별을 선고하고서. 작은 창 너머 수양버들이 잎을 찰랑이며 시원한 바람을 일으켰고, 홍차 맛은 달았다. 지난해 가을, 남편은 당시 내가 그를 기다린 자리에서 프로포즈했다. 서로의 짧은 부재로 간신히 얻은 다행. 

 

그 해 여름이 우리에게 남긴 것이다.
















비오는 날의 산책 코스


















어느 여름 농원에서 본 사과나무


















창 너머 도서관이 보였던 광장동 집


















장맛비로 축축해진 길 위의 능소화


















우리를 자주 내려다본 고양이


















지금은 혼자 먼 여행을 떠난 봄이와 남편

















성보람 ㅣ 포에지 대표

@milkywaybook

 

 

포에지(@page.poesie)라는 이름의 선물 가게를 운영하면서

프리랜스 라이프스타일 · 뷰티 에디터로 일한다.

시어 하나하나 공들여 고르듯 선물을 고르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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